유성영화의 출현
- 사실 영화 극초기부터 유성영화는 존재했다. 바로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축음기를 합친 키네토폰이다. 그 이후에도 유성영화를 위해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싱크 문제와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증폭 문제는 1906년에 오디온 튜브의 개발로 해결되고, 1919년에 독일에서 Tri-Ergon이라는 방식이 발명된다. 소리 신호를 빛 신호로 바꾸어 필름 구석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싱크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다. 1927년,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 제작사였던 비타그래프 스튜디오를 합병하여 비타폰이라는 사운드 시스템을 개발해 최초의 유성 극영화 《재즈 싱어》를 제작한다.
- 《재즈 싱어》는 그 해 35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신호탄을 울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할리우드 관계자는 유성영화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초기 유성영화는 음향의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이 별로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더라도 소리가 왜곡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즈 싱어》가 개봉하고 2년 만인 1929년에 제작된 영화의 75%가 유성영화로 제작되면서 무성영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무성영화를 고집하던 대표적인 스타로는 찰리 채플린을 꼽을 수 있다(단 채플린은 유성영화를 만들어서 살아남았다).
-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작품에서 이 당시 무성영화 배우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슈퍼스타들은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실제로는 목소리가 생긴 것과 안 어울린다거나, 발음을 제대로 못 한다거나, 사투리를 쓴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무성영화 시대에는 말 안하고 연기만 하면 됐으므로 적당히 연기만 잘하면 대성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의 등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열리자 당시 배우계에는 헬게이트가 열렸고,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투박하거나 경박한 목소리를 지녔던 배우들은 제 아무리 슈퍼스타라 할 지라도 첫 유성영화 데뷔에서 수많은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들며 대망신을 당하게 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성공적으로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배우들이 유명인 무명인 가릴 것 없이 몰락해 갔다. 주로 억양이 센 북유럽 계열이 많이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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